국내

그 어떤 괴로움도 없고 오로지 즐거움만이 가득한 곳 부석사 무량수전

테리우스의 일기장 2022. 9. 8.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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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억 불토를 지나 극락정토를 향하는 여정과도 같이, 일주문에서부터 안양루까지 오른 끝에 마침내 무량수전의 앞에 다다랐다.

 

국보 제17호인 무량수전 앞 석등과, 국보 제18호 무량수전.

 

우선 석등은 높이 2.97m로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 석등이다. 상하 비례, 조각이 정교하기에 당대의 석등 중 으뜸으로 뽑히는 걸작이다.

 

화창 주위 네 면에는 보살입상이 1구씩 조각되어 있는데, 천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형태를 제법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석등의 화창 부분을 잘 살펴보면 그 주변으로 12개의 못 구멍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과거에 석등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종의 창문을 달았었음을 알 수 있다.

 

큰 의미는 없다만 석등이 무량수전보다도 국보 문화재 순위가 우선한다.

 

부석사 내의 조사당이 국보 제19호인것으로 미루어 보면, 석등, 무량수전, 조사당 자음 순서대로 등록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그렇지 어찌 커다란 건물보다도 석등의 문화재적인 가치와 순위가 높은지 의아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오래전에는, 목재를 사용하는 것보다 돌을 깎아 정교하게 다듬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석탑은 대개 사이즈가 크기에 돌을 큼직큼직하게 다듬는다지만, 석등은 그보다 작은 사이즈이며 그 안에 조각을 하는 섬세한 손재주를 더해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기술을 요할 것이다.

 

더군다나 무량수전 앞 석등처럼 대칭미가 완벽하고 어디 하나 모난 부분 없는 작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비슷한 의미로 국보 제5호인 보은 법주사의 쌍사자 석등 같은 경우는 정교하면서도 화려하게 다듬은 세공 실력이 몹시 눈부시다...

 

석등과 무량수전을 한 눈에 담아 보았다.

 

위 사진을 보면 조금 의아스러운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석등이 무량수전의 정 가운데에 위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서쪽으로 아주 조금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약 6도 가량 기울어져 조성돼 있는데, 이에는 깊은 뜻이 있다.

 

바로 무량수전을 찾아오는 이들을 위한 아주 작은 배려라고 할 수 있겠다.

 

극락정토를 의미하는 무량수전은 다른 말로 극락전, 극락보전이라고도 불린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내부의 불상은 여타 사찰의 불상들처럼 중앙에 위치해 남방을 향하는 것이 아닌,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서쪽 세계의 끝에 위치한 극락정토에는 아미타 부처가 계시는데, 무량수전의 부처님은 극락을 향해 오는 중생들을 맞이하기 위해 동쪽을 보고 있는 것이다.

 

석등이 서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는 이유도 이곳을 찾는 이들의 동선이 동쪽으로 향하게 하기 위함이다...

 

무량수전

국보 제18호 부석사 무량수전.

 

건축가들은 이를 두고 '어느 하나도 빼거나 더할 수 없는 완벽한 건물'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량수전은 국내 목조 건축의 정수로, 오랜 세월이 짙게 묻어나 풍기는 그윽하고도 무거운 분위기가 상당히 압도적이다.

 

특히나 압권은 그 유명한 배흘림 기둥.

 

이는 위와 아래는 약간 가늘지만 몸통 부분은 불룩한 목재를 사용함으로써 미학의 극치를 구현해 냈다.

 

여기서 중요한 배흘림기둥이 단순히 미적 측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기둥이 받는 힘이 기둥의 중간 부분에 집중된다는 건축 공학적 측면에서도 완벽한 것이다.

 

이러한 목조 건축, 특히나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은 국내에 몇 남아있지 않다.

 

특히 목조 특성상 화재를 비롯하여 물리적, 화학적 재해에 몹시나 취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려시대의 목조 건축물 중 그 가치가 유독 뛰어난 것으로는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국보 제49호 예산 수덕사 대웅전

국보 제15호 안동 봉정사 극락전을 들 수 있다...

 

곡선의 절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팔작지붕을 받치고 있는 공포(처마 끝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 쪽) 역시 간결한 미를 보여준다.

 

고려시대에는 기둥머리에 공포를 한 개만 덧대는 주심포 양식이 성행하였다.

 

반면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기둥머리뿐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빼곡하게 덧대는 다포 양식이 성행했는데, 안양루의 경우 다포 양식으로 조성됐으니 무량수전과 비교하며 보면 재미가 난다...

 

무량수전의 현판으로 공민왕의 편액이다.

 

과거 공민왕은 홍건적을 피해 개경에서 안동으로 피신을 내려오는데, 이후 홍건적들이 진압되고 나자 다시금 수도로 상경하는 길에 부석사에 들러 현판을 써준 것이다.

 

국보 제45호 소조여래좌상.

 

아무래도 기도 도량의 내부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기에, 사진을 찍는 것이 무척 주저됐으나 타인에게 피해가 안 가게끔 무음 카메라로 조심히 촬영했다...

 

어쨌든 이 부처님은 통일신라 시대의 불상 양식 전통을 이어받아 고려시대에 제작된 작품이다.

 

무량수전이 고려시대 건축물이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짚고갈 점은 고려시대에는 철불이 유행하였는데, 신라의 양식을 그대로 흡수하여 이 불상을 만들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부처님의 얼굴은 무척 근엄하면서도 위엄이 드러난다. 부석사 경내의 차분한 분위기가 더해져 더욱 신성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앞서도 잠깐 얘기하였듯이 중앙에 앉아 남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서쪽에 치우쳐 자리 잡은 채 동쪽에서부터 극락정토를 향해 오는 이들을 반기고자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만큼 인상적이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이 지금까지 천년의 건축물로 그 명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후대에 들어 무분별한 보수공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 가지 바라는 바가 있다면 부디 지금처럼만 이 모습 그대로 이 자리에 있어줬으면 하는 바이다.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본 석등과 안양루 그리고 빼어난 자연의 풍경.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린 부석사 가람의 형태와 멀리 보이는 자연 그 자체가 하나의 큰 질서를 만들어 내듯이 조화롭게 보인다...

 

 

 

무량수전 뒤뜰의 부석이다.

 

실제로는 사진으로 보기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부석과 부석사에 얽힌 전설, 선묘 낭자의 사랑이야기는 이전 포스팅에서 길게 다뤘으니 생략하겠다...

 

다음 글에서는 국보 제19호 조사당 포스팅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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