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조선시대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제례를 올렸던 곳 종로 사직단

테리우스의 일기장 2022. 9. 15.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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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동.

 

우리나라의 각 주요 도시에서 가장 많은 지명을 가진 동네이다.

 

사직동의 유래는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제를 올리던 사직단에서 시작된다.

 

사직단은 종묘와 더불어 조선시대 국가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곳이다.

 

종묘는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인데, 역대 왕들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곳이다. 아울러 사직단은 토지신인 사(社)와 곡물신인 직(稷)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다.

 

종묘와 사직단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제례의 대상이었다.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농경이 가장 중요한 산업 기반이었던 조선시대에는 왕실에 제사를 지내는 종묘와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사직을 잘 지키는 일이야말로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백성을 잘 다스리는데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사극에 종종 등장하는 `종묘사직'을 잘 지킨다는 말은, 곧 나라를 잘 지키고 다스려야 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북적거리는 광화문 일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사뭇 조용한 분위기의 사직동에 다다른다.

 

 

현재 종로 사직동 일대는 공사중이다.

 

사직동 주민센터와 파출소를 비롯하여 기반시설 재정비가 이루어지는데, 이를 통해 사직단 일대 안향청 복원을 하는 사업이다.

 

따라서 지금은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다.

 

보물 제177호인 사직단의 정문이자 대문.

 

오며 가며 그저 스쳐 지나가듯 볼 법한 문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화마를 입은 뒤 새로이 중건하여 지금에까지 이른 나름대로 오랜 세월을 겪어온 문화재이다...

 

 

대문을 지나 내부로 들어서면 낮은 담장이 사각형으로 터를 세우고 있고, 그 내부에 또 사각 형태의 담장이 사직단을 둘러싸고 있다.

 

북문인 북신문.

 

홍살문 형식으로 돼 있는데, 동서남의 세 군데 문과는 달리 삼문의 형태이다.

 

북신문에서 사직단까지 이어지는 길은 일명 향축로라고 불리는데, 토지신인 사신과, 곡물의 신인 직신이 다니는 길이다.

 

내부로 들어갈 수 없어 멀리서 제단을 볼 수밖에 없었다.

 

 

 

위 사진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문은 서문인데, 왕은 서문에서 시작되는 길인 어로를 따라 중앙의 사직단 판위로 향한다.

 

과거 제례를 지낼 당시의 각종 제례 기구와 예법을 소개해 놓은 박물관이 조성돼 있다.

 

 

사직대제를 위한 그릇, 즉 제기들이다.

 

담는 것에 따라 그 모양새가 각기 다른데, 신을 향한 제사이다 보니 참으로 고급스러운 형태이다.

 

 

 

 

 

 

사직대제는 한 해에 세 번이나 지냈단다.

 

당시엔 농경사회였기에 농사를 관장하는 신들을 향한 제례 의식은 무척 중요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으나, 국가 최고의 제사를 일 년에 3번이나 치른다니,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꽤나 고된 일이지 않았을까 싶다...

 

 

 

230년이나 자리를 지켜온 향나무 한 그루를 보는 것을 끝으로,

 

종묘와 더불어 조선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사직단을 살펴보았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공사로 인해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였는데, 추후 정돈이 되면 다시금 찾아서 둘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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