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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폐위된 왕을 위한 최소한의 예우가 담긴 곳 서울 도봉구 연산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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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나 남산의 서울N타워를 직접 다녀온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다지 먼 곳도 아닌데 말이다.
그저 오며가며 멀리서 지켜보는 정도.

심지어 오늘 찾은 연산군묘는 더하다.

서울에서도 정확히 이 동네,
도봉구에서 나고 자란 나는,
연산군묘에서 1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를 나왔다.

아직도 종종 이 주변의 둘레길을 따라 걷기도 하는데,
정작 연산군묘를 직접 방문했던 마지막 기억은 언제였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초등학생 시절 때가 아니였을까 싶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이럴 때에 쓰는 것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으나,
곁에 있을수록 오히려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언제건 그 자리에 있을거라는 믿음, 혹은 안주감 때문일까?

 

사적 제 362호 연산군묘


모쪼록 마음을 다잡고 연산군묘를 방문했다.

묘의 입구와 작은 관리소의 모습이다.

그저 입구만 보기에도 폭군이라는 명칭이 붙은, 폐위된 왕이 잠든 이곳이
얼마나 간소한 곳인지 짐작이간다.

 


관람시간 안내 및 상설도.

유적지들이 대개 그러하듯 월요일은 정기휴일이다.

관람료는 무료다.

 


조선 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은 재위 기간 동안의 실정으로 인해 관민의 원성과 반발을 사게 된다.

결국 1506년 9월 중종반정으로 축출되어 폐주가 되었고,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귀양을 가서 2개월 후인 그 해 11월 사망하게 되면서 그곳에 묻혔다가,
1513년 연산군의 아내 폐비 신씨의 청이 받아들여져 경기도 양주군 해동면 원당리에 대군 신분의 예우로 안장되었다.

참고로 경기도 양주군 해동면 원당리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3동의 이 자리이다.

 


연산군묘의 전경이다.

한눈에 다 들어오는 소박한 모습이다.

 


상설도에 나와있다시피
이곳에는 연산군과 연산군의 폐출 후 거창군부인으로 강등당한 폐비 신씨의 묘뿐만 아니라,
3기의 묘가 더 있다.

가운데 줄에 있는 묘는 태종의 후궁인 의정궁주 조씨의 묘이며,
맨 앞 줄에서 왼쪽의 묘는 연산군의 사위인 능양위 구문경, 그리고 맨 앞 줄의 오른쪽의 묘는 구문경의 부인이자 연산군의 딸 휘신공주의 묘이다.

태종의 후궁이 왜 이곳에 함께 묻혀있는지는 조금 의아한 점이 있다.

 


가운데 줄의 의정공주 조씨의 묘 그리고
맨 뒤의 연산군묘(왼쪽), 폐비 신씨의 묘(오른쪽)가 보인다.

 

 


좌우 옆과 뒤쪽에 난 좁은 길을 통해 한 바퀴를 돌 수 있다.

후면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금세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왕이 아닌, 군으로 강등된 이의 묘이기 때문에
여타의 다른 왕들과 달리 애당초 능이라고 불리지도 않는다.

대군의 예우로 묘를 조성하였기 때문에 통상적인 능침의 형태보다 간소한 것이 특징이다.

봉분과 담장, 묘비 각 1쌍, 혼유석과 망주석 각 1쌍, 장명등 1쌍, 향로석 1좌, 재실은 갖추어져 있으나,
능에 세우는 석호, 석양, 석마, 사초지, 무인석 등은 없다.

사실상 광해군과 달리 연산군의 업적은 거의 없다.

칭찬할만한 점이라면
왜구와 야인의 침략이 잦은 지역에 성곽을 보수하고
이들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는 점 정도가 있는 반면,

경연의 중단, 언론 통제를 위해 사간원, 홍문관을 폐지하여
선조들이 닦아놓은 길을 잠가버린 데다가,
승려들의 도성 출입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연산군묘를 나오면 약 550년이 넘었다는 방학동 은행나무가 보인다.
거대해서 고개를 뒤로 꽤나 젖혀야만 그 모습을 다 담을 수 있다.

내게는 너무도 친숙한 나무이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커다란 나무라는 생각만 들었는데
이제는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동료 같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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