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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문주왕의 웅진 천도 이래 오래도록 이 자리를 지켜온 공주 공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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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를 방문한 뒤
공주의 구시가지에 들렀다.


연문광장 앞 회전 교차로를 지키고 서있는
무령왕의 늠름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무령왕릉의 내부 모습을 재현한
무령왕릉 연문의 모습도 그럴싸하다.

지난번 부여 교차로의 성왕상이나
공주의 무령왕상은,
서울에서 나고 자라 늘 세종대왕의 모습만 보았던 내게는
조금은 낯설면서도 신비롭게 느껴졌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백제역사 유적지구의 한 군데인
공산성의 서문 금서루의 모습이다.

산성의 모습이 참으로 정갈하면서도 이쁘다.

공산성은 백제 22대 왕 문주왕이 공주(웅진)로 도읍을 천도한 이래
성왕이 부여(사비)로 다시금 천도할 때까지의
백제 두 번째 산성이다.

백제가 한성, 지금의 서울 한강유역(송파)에서
웅진까지로 천도하게 된 이유는
누구나 알다시피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 때문이었다.

장수왕은 뛰어난 지략가이자, 국수급의 바둑 실력을 가진
승려 도림을 백제로 보내,
당시 백제의 21대 왕인 개로왕의 환심을 사게 만든다.

그리하여 도림은 개로왕으로 하여금
왕실을 화려하게 중축시킬 것을 건의하여
나라 재정을 무너뜨렸고,
이후 고구려로 도망쳐온 도림이 이 사실을
장수왕에게 보고하자,
475년 장수왕은 백제로의 진격을 한다.

뒤늦게 도림의 꾀에 넘어갔음을 깨달은 개로왕은
문주를 불러 명한다.

어리석은 자신으로 인해 나라가 이 지경이 됐으니
자신은 죽어 마땅하나,
문주 역시 이곳에서 죽음을 자처할 일은 없으니
도망쳐 왕통을 이으라는 것이었다.

이후 개로왕은 위례성을 빠져나와 도망치던 중
신하들에게 잡혀 아차산성에서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문주는 남쪽으로 내려와,
지금의 공주를 새 도읍지로 정한 뒤
개로왕을 이어 왕의 자리에 오른다.

 

 

금서루 비석군

 


금서루의 입구에는 47개의 비석이 정열 돼있다.

이는 공주를 빛낸 인물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본디 이 자리에 있던 것은 아니고
공주 시내 곳곳에 있던 것들을 한 자리에 모은 것이라고 한다.

 

 


위에서 내려다본 연문광장의 모습.

 

 

 


시간이 촉박했던 관계로 금서루의 모습만을 눈에 담고 돌아왔다.

언젠가
다시금 공주에 방문하게 된다면
해질녘 노을 반사된 금강을 바라보며
성벽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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