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여행에서 내가 가장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마곡사를 찾았다.
비록 마곡사는,
비슷한 연대를 가진 사찰들, 예를 들어 안동 봉정사나 영주 부석사처럼
국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란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목조 건축물 중에서 역사성을 지니고 가치가 뛰어난 것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더불어
유네스코로 지정된 우리나라의 산사, 산지 승원 7군데의 사찰 중 하나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 길을 오르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는 글귀가 쓰여진 거대한 돌을 마주할 수 있다.
마곡사의 연혁이다.
이곳의 연대가 요점적으로 간추려져서 보기 좋게 쓰여있다.
일주문을 지나 나무데크가 잘 깔려있는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저 멀리 징검다리가 보인다.
마곡사는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을 따라
남원과 북원으로 나뉜다.
북원에는 대광보전과 오층석탑, 대웅보전,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백범당이 있고,
남원에는 과거 조선의 세조와 얽혀있는 영산전이 있다.
산사에 대한 소개글이다.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선암사, 대흥사, 그리고 마곡사 이렇게
일곱 산지 승원을 일컫는다.
한국 불교의 무형적, 유형적, 역사적 측면에서 뛰어난
이 일곱 사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위 사진의 다리 넘어 좌측이 남원이다.
이곳에는 대표적으로 영산전이 있는데,
오늘날 마곡사에 남아있는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정말 안타깝게도 나는 영산전을 보지 못했다...
참고로
영산전의 편액은 조선 세조가 썼다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일화가 있다.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당대 훌륭한 학자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의 작가인
매월당 김시습을 자신의 곁에 두고자 했다.
그러나 김시습은
세조에게 밀려난 단종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자연에 은거한 생육신(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중 한 명이었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다.
어느 날 김시습이 마곡사에서 거처한다는 소식을 들은
세조는 몸소 이곳을 찾지만,
세조가 다다랐을 때
김시습은 이미 마곡사를 떠나 부여의 무량사로 향한 뒤였다.
끝끝내 자신과는 연이 닿지 않음에
세조는 탄식을 하고 만다.
그리고
영산전의 편액을 직접 쓰고,
한양에서부터 타고 온 연가마를 이곳 마곡사에 두고 돌아간다...
개인적으로 나는
조선시대의 왕들 중 세조를 상당히 높게 사는 편이다.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양대군 세조는
어린 왕을 몰아낸 폭군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드라마 혹은 영화에서도 세조를 악역에 가깝게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무척이나 개탄스럽고 안타까운 실정이다.
한국사 공부를 조금만 한다면
세조가 가진 업적이 얼마나 많은지,
조선의 스물일곱 왕 중에 세조보다 무능력했던 왕이 태반이라는 사실을
알 텐데 말이다.
그는 아직 나라의 기틀이 채 잡히지 않은 조선 초기에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국가의 주춧돌 같은 역할을 했는데,
북방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국방 및 군사적인 부분에도 힘을 쓴 데다가
태종이 처음 실시했었던 호패법의 재실행,
조선의 통치 규범을 확립시키고자 헌법전과도 같은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였고,
(이는 성종 대에서야 완성이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 국보 제2호,
종로 탑골공원을 지키고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 + 원각사)을 건립하여
불교 융성에도 힘쓴 왕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압구정 한명회를 비롯하여
충직한 심복들이 가득했는데,
이를 통해 세조가 얼마나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인물인지를
증명해준다.
더불어
마곡사에 얽힌 김시습과의 인연설로 볼 때
훌륭한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
그리고 유비가 제갈량을 직접 찾아갔듯이
본인이 몸소 발걸음을 향한 데서 겸손과
약간의 로맨틱(?)함도 찾아볼 수 있는 매력적인 왕이다.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사실 하나가
세조가 가진 무수한 업적을 희미하게 퇴색시켜버렸다.
물론
세계적으로
그 어느 역사에서나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지도자가 좋게 포장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긴 하다.
하지만
겨우 십 대의 단종이 왕위에 계속 앉아있었다면,
과연 어떤 업적이 있었을까...?
크게 놓고 봐도
지금의 국보 2호가 존재했을까? 싶기도 하다.
글이 조금 길어졌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다.
마곡사의 정문인 해탈문이다.
이를 지나 비로소 속세를 떠나 법계로 향한다는 의미이다.
겹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빛바랜 판액과 나무, 단청의 색에서
오히려 깊고 진한 향이 배어 나온다.
해탈문 통로를 두고
좌우에는 금강역사 두 분, 그리고
청사자를 탄 문수보살과 하얀 코끼리 위에 앉은 보현보살이 계신다.
해탈문을 지나면 마주하는 풍경이다.
저 앞에 마곡사의 두 번째 문인 천왕문이 보인다.
누군가의 정성이 담겨있는 흔적들.
어떤 염원을 가지고 돌을 쌓았을까.
무념무상으로 자기 수양이었을 수도 있겠다...
천왕문의 모습 역시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지만,
우직한 느낌이 풍겨져 온다.
겹처마 팔작지붕인 해탈문과는 달리,
천왕문은
공포를 짜올리고 전후면 공포 사이에 화반을
하나씩 겹쳐 설치한,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된,
박공지붕 집이다.
천왕문 옆에 홀로 서있는 나무 한 그루다.
이 나무의 삶이 어떠했는지, 얼마나 오래됐는지는 모르지만,
기둥 껍질이 까지고 또 까졌다.
그래도 흉하지 않고
굳건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 나무가 살아온 지난 역사일 것이다.
남원과 북원을 가로지르는 계곡물 위로 극락교가 서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 비로소
대광보전과 오층석탑을 마주할 수 있다.
마곡사 경내에서는 그 어떤 자연 하나도
이쁘지 않은 게 없었다.
마곡사 대광보전과 오층석탑의 모습이다.
대광보전 앞에 위치한 이 오층석탑은
보물 제799호로,
나라의 기근을 3일간 막아준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탑의 상륜부가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이 인상적인데,
고려시대 석탑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층 몸돌에는 사방을 지키는 사방불을 새겼다고 한다.
사방불이란
동서남북의 사방을 나타내는 방위개념이기도 한데,
모든 방향, 모든 공간에
부처님의 영원이 닿는다는
불신상주의 의미를 가진다.
마곡사의 중심 법당인 대광보전의 모습이다.
1788년에 중창되어,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바래고 또 바래진 단청에서
세월의 묵직함이 느껴져 전율이 감돌았다.
늠름한 용이 지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마찬가지로
내부의 부처님은 서에서 동을 바라보며 봉안돼있다.
대광보전이라는 높은 이름에 걸맞게
주불로 비로자나불 한 분이 계신다.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91호다.
화기에 따르면, 마곡사 영산회상도는 정조 12년(1788) 동홍 등 15명의 화승이 함께 조성하였다고 한다.
대형의 화면에 석가모니불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장면인 설법회를
짜임새 있게 그렸으며 비교적 탁한 색감과 도식적인 음영 표현 등
18세기 후반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뒷벽에는
조선 후기의 회화 특징을 잘 살린
백의수월관음도가 봉안돼있다.
크기가 무척이나 커서 고개를 높다랗게 들어야 한다.
관음보살님이 비교적 남성스럽게 묘사된 것이
특이하다.
크기가 주는 위압감도 있지만,
그림에서 풍겨져 나오는 환희심이 지대해서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대광보전 옆에 난 계단이다.
이를 오르면 대웅보전으로 향할 수 있다.
앞서 극락교에서도 그렇고,
이 계단을 장식한 연등이 참 작고 소박하니 귀엽다.
때때로
연등으로 너무 과하다 싶을 만큼 치장을 함으로써
조금은 부담감을 주는 사찰도 있는데,
그에 반해
마곡사는 최소한의 소담함으로 그 미를 빛내고 있다.
1785년에서 1788년에 걸쳐 중수됐다.
높다랗게 2층의 형태이지만 내부는 하나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목조 건물 중에
중층 건물은 그리 많지 않기에
가치가 높다.
대웅보전 내부에는 싸리나무 기둥이 네 개 있는데,
이를 안고 돌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요즘에야 아들보다 이쁜 공주님을 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과거 우리네 시대상을 알려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런 전설 때문인지
나무기둥 표면이 맨질맨질하다.
대웅보전 앞에서 내려다본 대광보전의 모습.
오층석탑을 다시금 담아본다.
부처님이 새겨진 모습,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남겨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대광보전의 옆으로 백범당이라 하여
백범 김구가 소싯적 거처했던 곳이 있다.
광복 후 김구가 다시금 이곳을 찾아 심었다는 향나무다.
나무를 베어내지 않고 돌담을 만들어낸 자연친화적인
모습이 돋보인다.
극락교를 건너 다시금 속세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해탈문과 천왕문을 한 화면에 담아보는 것을 끝으로
공주 마곡사를 떠나왔다.
단순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사찰이라는
표면적인 이유를 떠나,
마곡사는 마음속에서 끓어오르게 만드는 단단하고 뜨거운
열기를 전해준 곳이었다.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있고,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가진 데다가 재미난 설화를 품은 곳이기도 하다.
조상들이 걸어왔던 길을,
이곳의 오랜 자연이 살아온 길을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큰 감회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보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공주 가볼만한곳이자,
정말이지 꼭 한 번은 방문해보기를 추천하는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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