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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신문왕이 창설한 국학이 있던 자리, 경주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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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와 계림, 그리고 내물왕릉을 비롯한 각종 고분군이 자리 잡은 경주역사월성지구를 둘러본 뒤 다시금 길을 나섰다.

 

월정교를 향해 가던 중 마주한 경주향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 경주향교의 상용문.

 

외삼문이 따로 존재하지만 그곳으로 출입은 불가하다.

 

이곳은 경주에서 손꼽히는 부호인 최부자집을 중심으로 반촌이 형성된 교촌마을에 위치 해 있다.

 

경주향교는 신문왕 682년에 그 유명한 신라 최고의 교육기관인 국학이 세워진 자리로, 고려시대에는 지방 교육기관인 향학이,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지며 명맥을 이어왔다.

 

향교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이다.

 

보기에는 큰 사이즈인가? 싶으나, 꽤나 큰 규모란다.

 

경주 향교의 우물에도 나름대로 설화가 전해지는데,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효대사와 태종 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은 요석궁이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더불어 이 우물은 요석궁의 우물로서 설총이 이 우물의 물을 마시고 대학자가 되었다고 하여 일명 총명수라고 부른단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에 얽힌 이야기는 소요산 자재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소요산에서 수행을 하던 원효대사를 찾아온 요석공주와 설총이 기거하던 요석공주별궁지라는 터가 오늘날 그곳에 남아있다.

 

생각해보면 원효대사는 당나라로의 유학길도 다녀오고(해골물을 마신 깨달음으로 돌아왔지만), 경주에서 경기 북부의 소요산 자락까지 그 멀고 험한 길을 어찌 그리 다녔는가 싶다... ㅋㅋ

 

경주향교 대성전이다.(보물 제1727호로)

 

처음 지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조선 성종 23년(1492년)에 중수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됐으나 선조 33년(1600년)에 부윤 이시발에 의해 대성전이 중건됐고, 선조 37년(1604년)에 부윤 윤성이 대성전 좌우의 동무와 서무를 중건했다고 한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제법 사이즈가 큰데, 그럼에도 간결하고 정갈하며 단아한 선비같은 자태를 풍긴다.

 

화강석 석재를 이용한 기단부가 꽤나 오래된 느낌을 준다.

 

대성전의 내삼문 격인 신삼문에서 바라본 대성전의 모습이다.

 

신삼문 그리고 좌우로 동무와 서무가 보인다.

 

동,서무는 대성전의 좌우에 위치하여 향교의 제향 공간을 구성하는 건물이다. 

 

 

경북지방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향교인 경주향교.

 

크게 둘러볼 거리는 없다지만, 비교적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건물들이 많아, 예스러운 감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더불어 오래도록 유능한 인재들이 모여 학습했던 곳이라 그런지, 왠지 모르게 지적인 분위기가 상당히 묻어난달까...? ㅎㅎ...

계림을 벗어나 월정교, 교촌마을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으니 잠깐이나마 들러 옛 성현들의 발자취를 느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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