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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이제는 허망함만이 남은 동양 최대의 사찰 터 황룡사지(황룡사역사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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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교 근처의 카페 이스트 1779에서 목을 축이고 다시금 길을 나섰다.

최초 설정했던 다음 목적지는 국립경주박물관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박물관의 외관만 보고 황룡사지로 발길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월정교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징검다리를 건너 반대편으로 건너가야 하는 길.

앞서 월정교 관련 포스팅에서 언급한 바 있으나, 나의 뒤에는 나를 물귀신으로 만들고자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원수 하나가 있었기에 불안한 마음 때문에 제대로 된 월정교의 사진을 건질 수 없었다...

월정교에서 국립경주박물관으로 향하는 길.

애석하게도 카카오 택시가 하나도 잡히지 않았기에 도보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박물관에 진심인 나였기에, 경주 여행에서 국립경주박물관을 방문하고자 하였던 나의 욕구는 무척 강렬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고, 박물관을 견학한다면 황룡사지와 분황사를 들를 시간이 없었다.(황룡사지와 분황사는 18시까지 밖에 운영을 안 하는데, 당시 이미 해는 서쪽으로 가라앉던 때였다...)

결국 국립경주박물관의 현판만 눈에 담았다.

이곳에서도 택시가 상당히 잡히지 않았기에 도보로 황룡사지를 향해 길을 나섰다...

일명 황룡사마루길을 따라 걷는 길에 본 풍경.

나무데크 정갈하게 깔린 길의 옆으로 초록의 들판이 펼쳐져있어 시력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걷고 걸어 도착한 황룡사지, 황룡사 역사 문화관.

대한민국 사적 제6호이자, 2000년에 등재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경북 경주시 구황동 320-2
054-777-6862

*
경주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년) 월성 동쪽에 궁궐을 짓던 중 황룡이 나타나 그것을 방해하자, 궁궐의 축조를 중단하고 사찰로 고쳐 지은 곳이다. 이에 따라 이름도 황룡사라고 명명했다.

24대 진흥왕부터 28대 진덕여왕까지 무려 93년에 걸쳐서 조성된 황룡사는 신라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사찰이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당시 신라인들의 불교관과 염원이 반영된 곳이기도 하다.

신라를 상징하던 보물 중 하나가 바로 황룡사 중앙에 있던 황룡사 9층 목탑이었는데, 이는 당나라로 유학을 다녀온 자장율사의 권유에 의해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짓기 시작하여 645년에 완공된다.

당시 당나라 유학 중이던 자장 율사의 앞에 한 신인이 나타나 대화를 나누었다는데, 그 내용인즉슨 이렇다.

"우리나라는 북으로는 말갈, 남으로는 왜와 맞닿아 있고, 고구려 그리고 백제 두 나라가 국경을 침입하니, 백성들의 고통이 큽니다."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웃 나라에서 침입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니 본국으로 돌아가 절(황룡사) 안에 9층 목탑을 세우라. 그러면 이웃 나라(고구려와 백제)는 항복하고, 구한(동방의 아홉 이민족)이 와서 조공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는 이런 방대한 크기의 목탑을 건축할 기술자가 없었기에 백제에서 아비지라는 기술자를 데려온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각종 비단과 보물을 가지고 백제로 가 기술자를 청해오라고 기록돼 있다.)

신라로 건너온 아비지가 목탑의 건축에 들어 섰을 때의 연기설화(불교에서 절 혹은 탑의 창건과 관련된 설화)가 또 유명한데,
9층 목탑의 기둥을 처음 세우던 날 이바지는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에 불안한 마음이 든 이바지는 목탑 건설 추진에 대한 의문을 품었으나, 어느 노승과 장사가 나타나 나머지 기둥을 세우고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는 마음을 굳혀 탑을 완성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이는 국가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불교에 대한 당대인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황룡사 9층 목탑은 한 면의 길이만 22미터에 이르렀고, 전체 높이가 무려 80미터에 달했다.

아홉 개의 층은 당시 신라 주변에 있던 아홉 국가들을 상징했는데, 이는 외적들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 의지의 표현이었다.

*
9층 - 예맥
8층 - 여진
7층 - 거란
6층 - 말갈
5층 - 응유
4층 - 탁라
3층 - 오월
2층 - 중화
1층 - 일본

그러나 고려 고종 25년(1238년) 원나라, 몽골의 침입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사진에 채 담기지 않았으나, 저기 보이는 황룡사지 역사문화관을 중심으로 사방의 넓은 땅이 과거 황룡사의 터다.

구획 나뉜 드넓은 절 터를 보자 한숨부터 나왔다.

한때는 동양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지만, 눈길을 끄는 흔적이라고는 목탑지 바닥에 깔려 있는 넓적한 돌들 뿐이다.

이는 목탑의 초석으로, 중심에 위치한 돌이 황룡사 9층 목탑의 가운데 기둥을 받치던 심초석이다.

이제는 과거의 흔적만을 보여주는 돌무더기를 보고 있노라니, 이곳에 우뚝 솟아있었을 거대한 목탑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황룡사역사문화관의 입구.

09시부터 18시까지 매 시간의 정각마다 약 15분간 소요되는 3D 입체 영상이 상영된다.

마침 17시 정각 즈음이었기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맞으며 영상관에 앉았다.

영상관의 입구에서 3D 안경도 배급해준다.

영상의 내용은 황룡사의 건립부터 황룡사 9층 목탑이 설립되는 과정, 그리고 그 멸망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3D 영상물 답게 굉장히 입체적인 영상미를 뽐냈는데, 무엇보다도 원나라, 몽골의 침입 씬에서는 화살이 실제로 빗발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황룡사 9층 목탑이 화마에 휩쓸려 잿더미가 되는 모습을 보자 억하심정 때문에 열이 뻗치기도 했다.

하여튼 사료로 남은 것을 토대로 황룡사와 9층 목탑의 모습을 상당히 그럴싸하게 표현해낸 점, 자세하면서도 알기 쉽게 설명을 담아낸 점 등이 인상적이었고, 교육용으로도 무척 좋을 듯한 영상이었다.

영상관을 나오면 바로 옆에 황룡사 9층 목탑을 1/10 사이즈로 재현해 놓은 모형이 있다.

역사문화관 2층으로 올라와 내려다본 모형의 모습.

2층에는 황룡사 역사실이라는 전시실이 조성돼 있다.

황룡사 9층 목탑의 복원에 대한 건은 과거부터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거두 되고 있고, 각종 이해관계 당사자들 사이에 첨예한 대립도 깊다.

황룡사 고건축실은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에 대한 설명을 담고있다.

황룡사의 건축 기법을 체험할 수도 있다.

황룡사의 장육존상 모형과 그에 대한 설명이다.

장육존상은 황룡사에 있었던 거대 불상(5미터에 육박한단다.)으로 황룡사 구층목탑, 천사옥대와 더불어 신라의 3대 불교 보물 중 하나였다.

전시실을 다 둘러보고 테라스로 나오면 황룡사지 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찬란했던 위용에 인사를 전하기라도 하듯, 절터의 한 편에는 주홍빛 물결치는 황화코스모스가 만개해있다.

자장율사가 보살계본을 강설하고, 원효대사가 금강삼매경론을 연설하였던 황룡사.

만약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허무한 생각을 하게 되는 유적지이다.

괜스레 몽골을 원망해 보지만 진타보수계, 성내지 말고 때리지 말며 원수를 갚으려 하지 말라는 보살계본 범망경의 말씀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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