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향교를 나와 조금만 걸으면 아주 멋들어진 자태를 뽐내고 있는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른바 월정교.


월정교는 신라 경덕왕 19년(760년)에 궁궐 남쪽에 있는 문천 위에 다리를 놓은 것이 그 시초이다.
양쪽 문루의 2층은 일종의 전시 공간으로, 과거 이 터에서 발굴된 유물에 관한 설명을 해 놓았는데, 내가 방문했던 당시에는 출입 금지였다...

보시다시피 우리 고유의 향이 풍기듯 예스러우면서도 이쁘게 조성돼있어서 사진 찍기에 안성맞춤이다.

월정교 위에서 바라본 모습.
천년 도읍임에 적격임을 증면하듯 주변 산세가 눈에 들어온다.

천 위로 징검다리가 놓여 있는데, 저곳에서는 월정교의 전체 모습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나 역시 징검다리를 건넜으나 아쉽게도 월정교의 모습을 담을 수는 없었다.
비 온 뒤라 물살이 제법 세서 징검다리를 건너는 데에 다리가 후들거렸고, 무엇보다도 뒤에는 시시때때로 나를 뒤통수치고자 하는 원수가 있었기에 잠시도 한눈을 팔거나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ㅋㅋ

사실 월정교는 경주에서도 야경 맛집으로 통하는 곳이다.
나 역시 월정교의 야경을 보고 싶었으나 2박 3일간의 경주 여행은 너무도 타이트했기에, 월정교의 야경은 다음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한옥으로 잘 정비된 교촌마을을 알리는 표지석.
사실 교촌... 하면 치킨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나만 그런 거 아니겠지...?
어쨌든 교촌마을은 향교가 있는 마을을 뜻한다. 따라서 교촌마을이라는 것이 경주에만 조성된 것은 아니다.

교촌마을을 두리번거리다가 최부자집 앞에 섰다.
월정교, 경주향교와 더불어 월성 남쪽의 교촌마을에서 나름대로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관광지이다.
최부자댁은 1700년대에 조성된 가옥으로 원래는 99칸이나 되는 거대한 집터였단다.
지금은 사랑채와 안채, 문광채 정도만이 남아있어 과거의 명성을 눈에 담기란 다소 어렵다.
최부자 댁은 영남 일대에서 아주 손꼽히는 부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을 호사스럽게 꾸미지 아니하고 일반적인 양반촌의 가옥 정도 수준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기둥을 낮게 만들어 집의 높이를 낮춘 점, 집터를 낮게 닦은 점 등이 그 예인데, 이는 성현을 모신 경주향교를 높이 사기 위한 최부자댁의 배려가 담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부자집의 관람 안내도.
1947년 문파였던 최부자 12대손 최준 선생이 기증을 하였고, 지금은 영남대에서 관리 중이다.
최준 선생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이름 날린 인물이다.
그는 1914년 안희제가 세운 민족 기업인 백산상회에 자금을 댔으며, 자신의 집안을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로 사용하게 했다.
더불어 자신의 재산을 통틀어 현 영남대를 설립하는데 이바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최부자댁 사랑채의 모습이다.
사랑채는 1970년대에 화재로 불 탄 것을 새로이 복원한 것이란다.
내부에는 손님을 접대하던 사랑방이 자리 잡고 있으나 지금은 개방되지 않았다.
기단부는 경주향교의 대성전과 비슷하게 화강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와 안마당.

과거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는 최부자댁이지만, 지금 대중에게 개방된 모습은 무척 소소하다.
무엇보다도 영남대의 관리 소홀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수선하고 정비가 덜 된 부분이 곳곳에 눈에 띄었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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