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

향기로운 임금님의 절 분황사에서 본 모전석탑

반응형

황룡사지를 빠져나와 도보로 약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위치한 분황사에 들렀다.

내가 불자라는 것은 변론으로 하고 여행 시 가장 초점을 맞추는 키워드는 역사 유적지 방문이기에, 황룡사지와 더불어 분황사는 이번 경주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이었다.

분황사

분황사 주차장에 위치한 표지석이다.

이 표지석은 비교적 근래, 2016년에 새로 세운 것인데 사진으로도 보는 것보다도 그 크기가 무척 크다.

적어도 내가 국내에서 본 사찰 입구의 표지석 중에서는 가장 큰 듯...?

분황사의 정문.

분황사는 황룡사지나 감은사지, 또는 익산의 미륵사지처럼 분황사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유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그곳들과는 달리, 근근하게나마 사찰로서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경내의 규모는 작지만 나름대로 종무소 비슷한 사무실도 있고, 관리하는 보살님도 계신다.

어쨌든 일주문이나 천왕문은 따로 없고, 정문에 들어서면 경내가 한 눈에 보인다.

정문 옆에는 매표소가 있으며 요금은 성인 기준 2,000원이다.

종교적인 색채를 떠나 '국보 문화재' 입장료로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은데, 만약 2,000원이 아깝다고 느껴진다면 담벼락 너머로 분황사 모전석탑을 볼 수 있다. (담이 비교적 낮다.)

국가유공자, 경로자, 조계종 신도증 소지자는 무료 입장 가능이다.

경내 안내도.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년)에 세워졌는데, 그 해에 선덕여왕은 인평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이유는 분황사라는 이름 자체가 향기로운 임금님의 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염두한 것으로 추측한다.

더불어 앞서 표지석에 쓰여있듯이 분황사는 원효성지라고 불린다.

과거 원효가 분황사에 머물면서 그 유명한 화엄경소를 저술하였고, 그의 사후에는 아들 설총이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이곳에 모셔두고 공경하였다고 전해지며(삼국유사), 고려시대에는 원효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 화쟁국사비를 세웠다고도 한다.

 

이런 사료로 종합해 보았을 때 원효대사의 발자취가 깊게 물든 곳이기 때문이겠다.

이후 원의 침입과 각종 왜란을 겪으며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기에, 기록상 남아있는 규모에 비해 지금은 무척 아담한 사찰이다.

분황사 복원을 위한 복원불사 안내.

드디어 그토록 보고 싶었던 분황사 모전석탑을 눈에 담았다. (국보 제30호.)

정식 명칭은 분황사 석탑이나, 전탑을 흉내 내듯이 돌을 벽돌처럼 네모난 형태로 깎아 만든 양식이기에 모전석탑으로 불린다.

소실되고 또 소실돼 이제는 3층(높이 약 9.3m)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과거에는 7층에서 9층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신라의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으로, 분황사가 건립된 시기인 634년에 함께 세워졌다.

하부는 크고 탑신부로 올라갈수록 갸름해지는 형태이며 기단부의 위, 모전석탑의 네 모서리 쪽에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동물 한 마리씩이 배치돼 있다.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는 암사자가, 나머지 세 군데는 수사자이다.

놀랍게도 현재 사방을 지키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상을 제외하고 기존에는 사자상 두 마리가 더 있었는데(총 6마리), 현재 그 두 마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돼있다.

2마리의 사자상이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이유는 다름 아닌 일제의 만행 때문인데, 1915년 분황사 석탑을 일제가 해체, 조사 및 복원하던 중 2마리의 사자를 뜯어 조선총독부로 옮겼기 때문이다.


일제는 개성의 경천사지 10층 석탑(현재 국립중앙박물관 1층 로비에 전시 중)을 뜯어다가 불법 반출하였던 전적이 있기에, 이제는 그다지 놀라운 것도 아니다.

사방의 면 중앙에는 감실이 뚫려있으며 감실의 입구 양옆은 인왕상이 지키고 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상들은 저마다 옷의 무늬가 다르며 근엄하고 늠름하면서도 동시에 자상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7세기 신라 조각 양식을 살피는 데에 큰 사료가 된다.

무엇보다 이 인왕상들은 외부에 노출된 채 1,400여 년을 지냈음에도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 여전하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진다.

 

분황사 석정, 우물이다.

외부는 8 각형이며 높이는 약 70cm이고, 내부는 원형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는데, 국내에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돌우물 가운데에 가장 크고 우수하며 지금 사용해도 될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하단다.

설명에 따르면 조선 시대에 분황사에 있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 우물에 넣었다는 아픈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아무래도 조선 초기 정도전의 불씨잡변을 시작으로, 성리학을 내세우며 '숭유억불'을 하였던 국가 시책에 의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돌부처의 목을 잘라 우물에 넣었다는 것은 충격적인데, 이를 뒷받침할 사료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사실이라면 꽤나 가슴 아프기는 하다.

 

 

 

위 사진은 과거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여행 당시에 보로부두르 사원에서 찍은 것이다.

 

보로부두르는 미얀마 바간의 불교 유적군(열기구에 탑승해 둘러보는 것이 일품이다.)과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와 더불어 동남아 3대 불교 유적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그러나 서양 열강들의 침략 당시, 특히 네덜란드인들이 보로부두르 사원 내 불상들의 머리를 댕강 날려버린 만행이 여전히 남아 있다...

 

 

분황사 석정 앞에서 바라본 모전석탑의 모습이다. 그리고 한눈에 들어올 만큼 경내가 작다.

 

분황사 보광전의 모습.

 

금당이 전부 소실되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전각이다.

 

얼핏 봐도 외관이 상당히 낡았는데, 이는 과거 소실된 것을 1680년 5월에 다시금 지은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오래되긴 오래된 전각으로, 주심포 양식으로 된 공포가 아주 예스럽고 인상적이다.

 

보광전 내부에는 약 3.45m 높이의 금동약사여래상이 모셔져 있다.

 

한쪽에는 원효대사의 초상화도 모셔져 있는데 사진에 담지는 못했다.

 

전각 자체가 작기에 보광전 내부 역시 매우 좁다.

 

재차 모전석탑을 눈에 담으며 분황사와의 안녕을 고했다.

 

분황사의 당간지주다.

 

이는 분황사 경내에 있는 것이 아닌, 황룡사지에서 분황사로 가는 길에 덩그러니 놓여있는데, 이로 말미암아 과거 분황사의 규모가 지금보다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래는 분황사 모전석탑과 흡사한 정암사의 수마노탑 관련 포스팅이다.

 

 

 

진신사리가 봉안된 수마노탑을 찾아서, 5대 적멸보궁 정선 정암사

태백과 정선 당일 여행의 마무리는 함백산 언저리에 위치한 정암사였다. 정암사 일주문의 모습이다. 일주문 자체는 그다지 특색이 있지는 않다. 그래도 일주문을 지나 법화의 세계로 통하는 길

qlqlzhxh.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