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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한 여인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깃든 곳 영주 부석사(일주문에서 안양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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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기도 전부터 나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곳.

불자로서, 역사와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내가 국내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찰이자 문화유산인 부석사.

간단히 소개를 하자면 부석사는 신라의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원효대사와 더불어 화엄사상의 정수였던 의상대사의 업적은 무척이나 눈부시다.

당 유학길에 함께 올랐으나, 모든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고서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온 원효와는 달리, 의상은 꿋꿋이 당으로 건너가 지엄의 아래에서 수학한 뒤 고국으로 돌아와 무수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 시작은 671년 창건한 양양 낙산사.

이후 의상은 수년간 전국을 다니던 중 교학을 정비하고 후학을 양성할 터전을 마련한다.

그곳이 바로 이곳 부석사다.

부석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두가지의 설이 존재하는데, 우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의상이 국왕의 명을 받아 창건했다고 기록돼있다.

반면 '송고승전'에서는 보다 설화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당에 도착한 의상은 등주에 위치한 한 신도의 집에서 머물게 됐는데, 그 집의 처자였던 선묘라는 이름의 낭자가 마음속에 의상을 품는다.

결국 선묘 낭자는 자신의 애타는 속마음을 고백하지만, 불심에 깊은 뜻을 품고 있던 의상은 그녀의 뜻을 애써 외면한다.

이후 삼장 지엄의 아래에서 수년간 화엄경의 가르침을 배운 뒤 귀국길에 오른 의상은 다시금 의주의 신도 집에 들렀다.

지난 날 거처를 마련해주고 뒷바라지를 해주었던 신도에게 감사의 인사, 그리고 작별을 고하기 위함이었다.

의상이 귀국 행 승선에 오른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선묘 낭자는 그에게 전해줄 법복과 여러 가지 집기를 들고서 해안가로 급히 달려가지만, 의상이 몸을 실은 배는 이미 떠난 후였다.

이에 선묘는 기도한다.

'저의 참된 뜻은 법사를 공양하는데 있습니다. 부디 이 몸이 용이 되어 저 배의 선체와 노를 지키고 법사님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가 법을 전파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녀는 바다에 몸을 바친다...

고국으로 돌아와 산천을 돌아다니던 의상은(낙산사 창건 이후의 일이다.) 고구려의 먼지와 백제의 바람, 그리고 소와 말이 접근하지 못하며 전쟁과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천해의 터를 발견한다.

이를 두고 그는 '땅이 신령스럽고 산이 수려하니 참으로 법륜을 굴릴 곳'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미 그 터에는 반천, 500명이나 되는 권종이부의 잡스런 무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여기서 권종이부는 삿된 법을 믿는 군승들을 칭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법화종의 승려들이라는 견해도 있단다.)

이때 의상을 곁을 지키던 선묘룡이 술법을 일으켜 높이와 길이가 1리가 넘는 거대한 바위로 변하였고 이에 잡스러운 무리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이렇듯 부석이라는 이름은 수호룡이 된 선묘 낭자가 커다란 돌로 현신하여 잡귀들을 물리쳤다는데서 유래하였다.

참고로 무량수전의 뒤편에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거대한 바위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낭자의 화신이라고 전해진다.

이처럼 부석사라는 이름에는 의상을 연모한 한 여인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그리하여 부석사를 창건한(676년) 의상은, '불법에는 높고 낮음이 없이 평등하며 신분에도 귀하고 천함이 없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을 설파하였고, 이후 또다시 정처 없는 수행 길에 오른다.

훗날 그와 그의 제자들은 화엄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 각지에 사찰을 창건하는데, 이를 화엄십찰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부석사의 창건 이듬해인 677년에 구례의 화엄사에 조성한 지금의 각황전, 678년에 창건한 부산 범어사, 679년에 화엄도량으로의 재개편을 한 계룡산 갑사, 그리고 100년이 더 지난 후 의상의 화엄사상을 받든 제자들이 뜻을 모아 창건한 합천 해인사 등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임을 알리는 영주 부석사의 표지석이다.

부석사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고 하여 7개의 사찰로 이루어진 연속 유산이다.

연속유산이란 지리적으로 서로 접하지 않은 두 개 이상의 유산지를 포함하는 문화 혹은 자연 유산을 의미한다.

'살아 있는 불교 유산'인 그 일곱 사찰은 다음과 같다.

1) 양산 통도사
2) 영주 부석사
3) 안동 봉정사
4) 보은 법주사
5) 공주 마곡사
6) 순천 선암사
7) 해남 대흥사

이들은 종합적인 불교 승원으로서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찰로,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종교 활동, 의례, 강학, 수행을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으며, 다양한 토착 신앙도 포용하고 있다.

2022년 9월 기준 마곡사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사찰에는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가 한 점 이상 존재한다.

천년의 세월이 살아 숨 쉬는 곳, 수많은 국보, 보물 문화재가 산재해 있으며 아름다운 설화가 전해지는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본다.

태백산 부석사의 일주문이다.

칠을 새로 단장했는지 예스러운 느낌은 없다.

일주문을 지나서부터는 잘 깔린 은행나무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으며,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야 한다.

그래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 길이 이렇게 평탄하지 않았는데, 편의성을 위해 멀끔하게 조성했나 보다.

부석사 당간지주

일주문을 지나 걷다 보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문화재, 보물 제255호인 부석사 당간지주.

지난 1,300여 년의 세월 동안 이 자리를 지키며 우뚝 서 있다.

당간지주의 크기는 그 사찰의 물리적, 문화적 규모와 대개 비례하는데, 이 당간지주는 약 4.8m로 무척 높고 사이즈 자체가 크다.

오래전 화엄종찰의 근본도량이었음을 보여주는 기세 높은 자태가 멋들어진다.

참고로 불국사를 비롯하여, 이제는 터만 남았으나 과거 상당한 규모였던 황룡사나 익산의 미륵사의 경우는 당간지주 두 기가 나란히 서 있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천왕문이 보이고

천왕문을 지나면 또 계단길이 펼쳐진다.

계단 한 칸 한 칸이 비교적 높아서 신체 조건이 여의치 않은 사람이나 어르신들은 오르기가 어려울 수 있는데, 사진에는 담지 않았으나 우측에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는 아스팔트 길이 조성돼 있으니 그 길을 이용하면 한결 수월할 것이다.

어서 이 길의 끝에 다다르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들떠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느새 회전문에 다다랐다.

이 회전문을 통과하면...

가운데에 범종루를 중심으로 좌측과 우측에 삼층석탑 두 기를 볼 수 있다.

동서로 마주 보고 있는 이 두 기의 삼층석탑은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부석사에서 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절터에 있던 것으로 1966년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모습은 단순하지만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대칭 미가 인상적이다.

삼층석탑의 뒤편에 있던 것을 사진에 담아보았다.

얼핏 보기에도 상당히 오래돼 보이는데, 어째서 이렇게 방치하다시피 해놨는지는 모르겠다.

생김새로 보아 어둠을 밝혀주는 일종의 석등인 듯하다.

누각식 형태인 범종루.

아래층은 계단이 나 있는 통로이고, 2층에는 운판, 목어, 법고가 걸려 있다.

범종루이지만 범종은 없는데, 이 옆쪽에 따로 종각을 지어 그곳에 달아 놨다.

참고로 위 사진의 정면에 보이는 북처럼 생긴 것이 법고, 물고기 모양으로 생긴 것이 목어, 그리고 우측에 걸려있는 양철 장식이 운판이다.

범종은 인간과 중생을 위해,
법고는 땅 위의 것들을 위해,
목어는 물속의 것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운판은 하늘을 나는 것들을 위해 울리는 것이다.

범종루를 지나면 석축 위에 세워져 있는 안양루를 마주하게 된다.

안양루는 조선 후기의 목조 건축물로서, 범종루와 마찬가지로 2층 누각 건물이다.

조선시대의 건축답게 기둥 위를 화려하게 가득 채운 다포 양식이며, 팔작지붕이다.

안양루의 1층과 2층에 각기 현판이 걸려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1층에는 안양문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안양이라는 글자는 경기도 안양시의 안양과 같은 한자로, 불교에서 안양은 극락정토를 의미한다.
(참고로 안양시에는 40여 개가 넘는 사찰이 존재하며 안양사의 이름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2층에 걸린 부석사 현판은 과거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다녀간 기념으로 써준 것이다.

아미타경에 따르면 인계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토를 지나면 그 끝에는 아미타불이 설법하는 곳, 그 어떤 괴로움도 없으며 오로지 행복만이 가득한 곳, 바로 극락정토가 있다고 한다.

이제 그곳에 거의 다 왔다.

(다음 포스팅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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