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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빼어난 용모의 지략가 김춘추가 잠든 곳 경주 태종 무열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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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김유신 묘를 방문한 뒤 이어서 무열왕릉으로 향했다.

김유신 묘와 무열왕릉 사이를 오가는 대중교통은 없고, 도보로 이동하기에는 제법 거리가 있기에 김유신 묘 입구에서 택시를 이용했다.
(기본요금 거리인데 사실 택시도 잘 다니지 않는다...)

김유신 묘와 무열왕릉은 경주고속터미널 기준으로 서쪽에 동떨어져 위치한 유적지로, 이왕 방문할 거면 두 군데를 엮어서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

무엇보다도 김춘추와 김유신은 둘도 없는 절친이었던 만큼, 두 묘역을 함께 방문해야 좀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사적 제 20호인 경주 무열왕릉.
이어서 김유신 묘가 사적 제21호로 지정됐다.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842.

무열왕릉의 정문인 건무문.

건무문을 지나면 가장 처음 마주하게 되는 비각으로, 사실상 무열왕릉 자체보다도 더 들여다볼만한 가치가 있는 국보 문화재다.

 

태종무열왕릉비

국보 제25호 태종무열왕릉비이다.

이는 661년, 김춘추의 아들이자 삼국통일의 업적을 완성해 낸 문무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길이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비석의 몸체는 없고, 비석의 머릿 부분인 이수와 비석의 받침 역할을 하는 귀부만이 남아있다.

귀부는 목을 치켜세우고 있는 거북이의 형상으로 상당히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거북이의 등껍질 부분에는 구름무늬가 둘러져 있고, 중앙에는 비석 받침대가 있다.

비석의 머릿 부분인 이수에는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용의 형상이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어, 당시 신라인들의 정교한 공예 실력을 엿볼 수 있다.

고개를 빳빳이 치켜든 거북이의 모습에서 용맹한 신라인들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아래는 종로 파고다 공원 내부의 대원각사비이다.

보물 제3호 대원각사비.

이는 조선 성종 2년인 1471년에 세워진 것으로, 세조가 이 자리에 원각사를 창건하였던 경위를 적은 비석이다.

거북이 형태의 귀부와 비석의 머릿 부분인 이수의 형태까지 무열왕릉비와 상당히 비슷한 형태이다.

물론 두 유물 간에는 800여 년이 넘는 시간이 존재하지만 말이다.

거북이의 형상에서는 조금 차이가 느껴진다.

대원각사비의 거북이는 아무래도 사찰 내부에 존재하던 것이기 때문인지 신비로운 느낌을 풍기는데, 약간 현무를 연상케 하는 얼굴이다.

반면 태종무열왕릉비의 거북이는 진취적이고 용맹함이 느껴지며, 생김새는 거북이 그 자체의 형상인 듯하다...

태종 무열왕릉 비.

봉분의 높이는 약 8m, 둘레 약 113m, 지름 35.5m이다.

어째서 무열왕릉이 천망총이나 금관총, 황남대총에 비해 사이즈가 작은지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마립간 시대 이후, 법흥왕 대부터는 그 왕릉이 경주 시내의 평지에서 벗어나 산지의 구릉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때에 묘제에도 변화가 생기는데, 이전에는 도굴이 어려운 신라 고유의 무덤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이었으나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뀌었다.

신라시대 굴식 돌방무덤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무열왕릉이다.

사실 무열왕릉은 서악동 고분군에 존재하는 6기의 무덤 중 피장자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다.

나머지 다섯 무덤의 피장자는 밝혀지지 않았는데, 과거 추사 김정희는 남은 다섯 무덤이 법흥왕릉, 진흥왕릉, 진지왕릉... 일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이를 뒷받침할 타당한 근거가 부족하다

굴식돌방무덤으로 변화가 생기면서 왕릉 자체의 규모가 축소됐다.

여담이지만 김춘추는 무척이나 빼어난 용모로 유명하였다는데, 그를 뒷받침할 증거가 각종 문헌에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 진덕왕 2년의 기록.

삼국사기 태종 무열왕 원년의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와 일본서기에도 김춘추의 용모에 대한 칭찬은 자자하게 기록돼있다...

무열왕릉 내부에는 높다란 키의 나무들이 듬성듬성 위치해있는데 작위적이지 않은 느낌이어서 오히려 더 멋들어졌다.

 

무열왕릉의 뒤편으로 다섯 기의 무덤이 있다.

앞서 얘기한 서악동 고분군을 이루는 무덤들로 피장자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고분군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보고 내려오며 측면에서 찍어본 무열왕릉의 모습.

김유신에 이어 김춘추까지.

한 시대를 호령했던 인물들의 그 발자취가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어릴 적엔 왜 하필 삼국 중 신라가 통일을 이룩해 냈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외세(당)의 끄나풀 역할을 자처했던 김춘추를 비난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즈음 고구려와 백제는 이미 내부적으로 좀먹은 상태였다.


통일을 만들어 내기까지의 과정을 무척 지략적으로 설계하였다는 점에서 김춘추가 매우 비상한 지도자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경주터미널 방면으로 향하는 정류소.

어느덧 경주 여행의 끝자락에 다가섰다.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이느라 사전에 계획했던 유적지들을 전부 둘러보지는 못했다.

경주 2박 3일은 무척이나 짧고 짧은 시간이었다...

 

 

 

삼국통일에 이바지하였던 태대각간 흥무대왕 김유신의 묘(경주)

경주에서의 셋째 날이 밝았다. 상경행 ktx가 오후 시간대였기에 몇 군데의 유적지를 더 둘러볼 여유가 있었다. 그리하여 결정한 목적지는 김유신 묘와 무열왕릉 두 군데였다. 숙소가 위치한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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