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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사비 시대 백제 문화의 정수 정림사지 5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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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로의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부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 버스는 세종을 거쳐 공주를 지나 부여로 향했는데,
도중에 휴게소에 들르지를 않았다.

만약 화장실이 급하다면
세종 터미널이나 공주 터미널에서 기사님에게
따로 말을 해야한다.


이윽고 부여에 다다랐다.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성왕이 이곳의 초입에서 부터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있다.

위 성왕상은
부여의 주요 관광지인 낙화암과 버스 터미널의 사이에 위치해 있어,
부여에 있는 동안 제법 자주 볼 수 있다.


아담한 부여 버스 터미널의 모습.

터미널 인근에 위치한 모텔(고란초 모텔)에 체크인을 하고
본격적으로 정림사지로 향했다.

참고로 묵었던 고란초 모텔은 터미널과도 가깝고, 정림사지 및 국립 부여 박물관과도
인접해 있으며,
근방에 시장도 위치해 있어 지리적으로 아주 편리했다.

 

 

정림사지의 중문

 


내부로 들어서자,
동서남북 대칭적인 회랑의 한 가운데에
정림사지 5층 석탑의 위용이 한 눈에 들어온다.

중문을 지나 탑 - 금당(터만 남아있다) - 강당이 일렬로 배치된
백제 가람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국보 제 9호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의 모습


부여 여행의 꽃이라고 가히 표하고 싶은 위용이다.

사진에 담긴 모습은 다소 작아 보일지 모르겠으나,
무려 약 8.8m의 높이를 자랑하는 탑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것은
백제의 사비 도읍기(538~660년)에 건립된 것으로
무려 14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곳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있다.

누군가는
딸랑 탑만 남아있는 절터에 볼게 뭐가 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견해를 말하자면,
대칭과 완벽한 구조미를 자랑하는
이 역사적인 탑 하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의 또 다른 이름으로는 평제탑이 있다.

이는 660년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복한 것을 기념삼아
탑의 1층 탑신부에 승전기공문인 '대당평백제국비명'을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탑을 한 바퀴 돌며 그 새겨진 글귀를 살펴보고 싶었지만,
그 상처의 말이 이제는 바래지고 희미해져 분간해내기 힘들었다.

보물 제 108호 정림사지석불좌상


탑을 지나 강당 안으로 들어오면
높이 562cm의 석조불상을 마주할 수 있다.

원래는 야외에 있던 것이지만,
극심한 신체 파괴와 마모로 인해 강당 내부로 옮긴것이라고 한다.

이는 고려시대에 정림사를 재건하면서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정림사지 강당의 치미


언젠가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백제 특별전을 관람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백제의 치미를 유심히 살폈던 기억이 난다.

전통 건축의 용마루 끄트머리에 올리는 치미는
그 건물의 위용을 자랑하는 상징적인 것이다.

마치 봉황의 날개를 연상케하는 이곳의 치미가 돋보인다.

 


측면에서 바라본 탑 - 긍당 - 강당의 배치.

 


정림사지를 둘러본 뒤 박물관으로 향했다.

 


정림사 명문기와의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 발굴조사에서 '태평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
라고 새겨진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리었음이 밝혀졌다.

 


이곳에서 출토된 갖은 유물들이 전시돼있다.

너무도 정교해 진품인줄 알았지만,
모조품이었다.

 


제법 이쁜 영상미로 이해를 돕기도 한다.


과거 정림사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미니어처가 보인다.

황룡사도 그렇고 미륵사 등 과거의 유구한 모습을 자랑하는
절터들이 아직까지도 건재하다면 어떠했을지 너무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쉽고 안타깝기도하다.


웅장했을 그 모습을 이렇게 재현한 형태로나마 감상해본다.

 


앞서 석탑의 탑신부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았던
소정방의 그 글귀를 이렇게 확인해본다.

 

 


백제의 불교 역사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참고할 수 있다.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며
백제의 흥망성쇠를 함께해온 정림사지 5층 석탑.

한번쯤 눈과 마음에 꼭 담아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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