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를 헤치고 김제를 찾아온 이유.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국보 1점과 보물 10점이라는
상당한 양의 문화재를 간직한 사찰인
모악산 금산사를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주차장에서부터 경내에 다다르기까지는
도보로 대략 15분 정도 소요된다.
초록의 숲길이 펼쳐져있다.
무척 덥고 습한 날씨였지만
그래도 나무 그늘 아래를 걸으니,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초목의 향이 어우러져
산뜻했다.
인공폭포도 보인다.
가동시간이 정오부터라기에
물이 흐르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사극에서나 나올법한 소담한 돌담길을
거닐다 보면,
모악산 금산사 일주문을 마주하게 된다.
양 기둥 위로 큼지막한 맞배지붕이 돋보인다.
맞배지붕은 완각이 잘려
양측면이 노출되는데,
매우 간결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윽고 금산사 도량이 보인다.
이끼 내려앉은 돌의 색감이
작은 개울, 돌다리와 어우러져 신비로운
느낌을 줬다.
앞서 일심을 상징하며
세속에의 번뇌를 내려놓는 일주문에 이어
금강문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의 금강문은 1994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본래 조선시대 때 세워진 금강문이 여전히 남아있는데,
이는 현재의 금강문 오른편에 위치해있다.
1994년 가람을 일신할 때 절의 입구를 변경하며
금강문을 새로 세웠던 것이다.
법불을 수호하는 금강역사 두 상과,
청사자를 탄 문수보살 그리고 하얀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 상이다.
금강문을 지나면 곧바로 천왕문을 마주할 수 있다.
금강문과 더불어 천왕문 역시 1994년에
새로이 조성한 것이란다.
천왕문을 지나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보물 제28호인 금산사 당간지주를 발견할 수 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모습이 돋보인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당간지주 중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익산의 미륵사지에서 나타나는 예와 비슷한 가닥이 남아있는데,
(지주에 세 가닥의 홈을 마련한 것)
이로 미루어보아
그와 비슷한 연대(8세기경)에 조성된 것이라고 추정된다.
운동장을 연상케 하는 넓은 부지 안에
다양한 문화재가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볼거리가 무수한 금산사이지만
그래도 가장 먼저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웅장하면서도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는
미륵전이었다.
국내 곳곳에 산재해있는
국보를 답사하는 나에게,
금산사 미륵전은 내가 이곳을 찾은 원동력과도 같은 존재였다.
미래의 부처인 미륵부처가 불국토에서 중생의 교화하는 것을 상징하는 법당으로,
사찰에 미륵신앙이 녹아든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미륵전은
신라 경덕왕 당시에 활동했던 진표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표율사의 출생지가 바로 이곳 김제라고 알려져 있는데,
(출생 시기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대략 734년경으로 추정)
금산사의 설립 시기는 백제 법왕 당시(599년) 또는 무왕 1년(600년)으로 기록돼있지만,
훗날 이곳에서 진표율사가 출가함으로써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진표율사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금산사에서 출가한 뒤,
전북 부안 변산에 있는 낭떠러지 절벽의
'부사의 방장'(한 사람 겨우 누울 수 있을 만한 절벽에 붙은 바위)에서
수행을 하였다한다.
이때 그가 하였던 수행 방법이 널리 알려졌는데,
망신참법이라 하여 온몸을 돌에 두들기는 방법으로써
고통을 수반한 다소 극단적인(?) 수행법이다.
수행에 이른지 7일째 되던 날
지장보살이 나타나 진표율사를 보살펴주었고,
21일로 기도를 마치던 날
도솔천의 천주인 미륵이 내려와
점찰경 2권과 증과간자 189개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진리의 표상이라는 뜻의
진표라는 이름도 이때에 미륵으로부터 받은
법명이라고 한다.
또한,
미륵불은 창생을 걱정하는 진표율사에게
'밑 없는 시루를 걸고 그 위에 불상을 세우라'라는
계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에 진표율사는 금산사에 있던
연못을 메우고 전해 들은 대로
밑 없는 시루 위에 불상을 세움으로써,
금산사 미륵전이 조성됐고 이곳은 미륵신앙의 성지가 됐다.
미륵전 외부의 벽화 모습이다.
국내 사찰 중 유일한 3층 형태의 목조 건물인 만큼,
거대한 규모에 걸맞게
총 187점으로 확인된 방대한 양의 벽화가 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 있는
우람한 크기의 미륵전 기둥.
지금의 미륵전은 정유재란 당시 소실된 것을
조선시대 인조 13년(1635년)에 수문대사가 다시 지어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바래진 단청은 얼마나 무수한
기억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을까.
11.82m에 달하는 본존불과
좌측의 법화림 보살, 우측의 대묘살 보살이다.
양 협시 보살의 크기는 8.79m이다.
불단 아래에는 거대한 청동 대좌가 있는데,
앞서 설명했듯이
진표 율사가 미륵불의 계시를 받았다는
'밑 없는 시루'이다.
본존불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소실되고, 또 복원의 과정을 거쳤지만,
청동 대좌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3층 형태의 거대한 법당 자체가 주는
압도적인 웅장함과
짙은 시간의 흔적에 넋을 놓기도 잠시,
근엄한 표정을 한 삼존불의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미륵전 우측 벽면에 봉안된 제석천룡탱화.
1890년(고종 27년)에 조성된 그림으로,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며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탑의 재질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것이
특징인 석탑이다.
조성 연대는 1079년 경이며
신라의 건축 양식에서
고려 초기의 화려한 장식 공예 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만들어졌다.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좌대이다.
높이가 1.67m 둘레가 10.3m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인데,
이 정도 크기의 대좌를 필요로 했던 불상이라면
그 불상의 크기는 얼마나 거대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각 면의 연꽃무늬가 상당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보물 제27호 육각다층탑과 보물 제23호 석련대,
그리고 대적광전의 모습을 담아보았다.
앞면이 무려 7칸이나 되는데
그래서 좌우로 상당히 긴 모양이다.
멀리 떨어져서
길쭉한 대적광전과
높다란 미륵전을 한눈에 담으면
상당히 인상적이다.
특이하게도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의 좌우로
무려 5 여래와 6 협시 보살이 봉안돼있다.
이렇게나 많은 수가 모셔진 것은 상당히 유례없는 것인데,
이는 사상이나 종파에 치우침 없는
한국 불교의 특징을 담은 것이다.
노주란 탑의 상륜부를 장식하는 구성물인데,
지금 왜 이 자리에 단독으로 조성돼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조성 기법을 간직한 채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기에 보물로 지정됐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팔각석등의 모습이다.
금산사는 전쟁(정유재란)과 화재 등으로
훼손되거나 소실된 것이 많고
가람의 변천 또한 잦았는데,
보물 제828호 팔각석등은 한결 같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거의 온전한 모습 그대로라고 하는데,
과거 은은한 빛을 발하며
도량의 불을 밝히던
석등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이 대장전 역시
진표율사가 사찰을 중창하던 시기에 세워졌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거치며
새로이 짓고, 자리를 옮겨 지금의 이 자리에 세워지게 됐는데,
그럼에도 지붕 꼭대기의 석조 보주는
신라시대의 그것 그대로라고 한다.
지붕 한가운데에 불꽃 모양의 석조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대장전 내부에는
불단의 본존불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자리 잡고 있다.
무엇보다도 벽면을 가득 채운
10폭의 벽화가 눈에 띈다.
대장전의 꽃살문이다.
문살이 교차하여 형성된 육각형의 영역 안에
여섯 장의 꽃잎을 새겼다.
색이 바랬지만
그래도 붉은색과 푸른색의 조화가 어울리고 화려하다.
대적광전의 뒤편으로는 삼성각이 위치해있고,
은은한 빛감의 꽃길을 따라 걸으면
나한전을 마주할 수 있다.
나한전 앞에서 바라본
극락전과 금산사 오층석탑(보물 제25호)의 모습.
계단을 따라 오르다 보면
어느 센스 넘치는 분의 손길이 닿은
동자스님들이 귀엽게 옹기종기 앉아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오면
두 점의 보물과 극락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계단이란 계를 수여하는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석종형의 탑신을 받치고 있는
네모난 돌에는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그 수법을 고려할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7.2m의 비교적 단순하고 소박한
금산사 5층 석탑의 모습이다.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 금산사 오층 석탑 중창기)가
발견됐는데,
그것을 통해 조성시기와 관련 인물 등이
자세히 기록돼있다고 한다.
더불어
각종 사리장엄구와
불상 8점, 동자상 1점 등 조선시대 초기의
작품들도 함께 출토됐다.
계단 위 높은 곳에서 바라본
금산사 경내의 모습.
널찍한 도량 안에 참으로 많은 문화재가
자리 잡고 있다.
방등계단 옆에 위치한 적멸보궁.
계단에 있는 사리탑에 예불을 드리는 곳이다.
때마침 경배를 드리는 스님의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방해되지 않도록 무음 카메라로 찍은 것.)
불전 내부에 따로 불단을 차려 불상을 봉안하지 않는 것은
통도사 대웅전과 같은 예이다.
적멸보궁 옆에 난 계단을 따라
극락전의 측면으로 내려오면 작은 연못이 있다.
큼지막한 크기의 새하얀 수련,
그리고 황금빛의 잉어들이 노닐고 있다.
국보 제62호 미륵전을 시작으로
보물 제22, 23, 25, 26, 27, 28, 827, 828호 까지도 둘러보았다.
이밖에도 보물 몇 점이 있지만,
시간 관계상 둘러볼 수 없었다.
이토록 상당한 양의 성보문화재가
가득한 사찰은 몹시 드물다.
백제시대에 창건된 이래
신라 진표율사의 손길을 거쳐
후백제의 견훤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고려, 조선시대까지 이어져오면서
각 시대별, 국가별 역사와 문화가 한 데 어우러져 공존하는 곳이다.
물론
정유재란 때에 대부분이 소실됐기에
오늘날 금산사의 모습은
비교적 근래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럼에도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흔적들도 많다.
아무래도 오랜 세월 동안
가람의 배치가 자주 바뀐 탓인지,
전체적인 균형이
다소 정돈되지 못하고 어수선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천년이 훌쩍 넘는 세월의 흔적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곳 모악산 금산사는
속리산 법주사, 금강산 발연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미륵성지이다.
현세에 미륵이 출현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
내세에 내가 미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는
저마다의 견해 차이겠다.
다만
다 함께 잘 살기를 바라며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음을, 혹은
누구나 부처로부터 구제받을 수 있음을 외치던
선조들의 사상이 이곳에 진하게 묻어져 있다.
대중 속에 녹아들고자 하였던 불교의 교리 미륵신앙.
그리고 그 성지인 금산사는,
꼭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방문하여
요동치며 흘러온 우리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준다고 생각한다.
금산사를 둘러본 뒤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와
점심 식사를 했다.
한일회관이라는 곳에서 산채 비빔밥을 먹었는데
역대급 최악이었다. ㅋㅋㅋ
전라도 음식은 맛있다는 고정관념이
아직도 박혀있어서,
내심 기대했는데 이게 웬걸
비빔밥 재료는 다 말라비틀어져있었다.
밑반찬은 오래된 것을 감추기 위해
식초를 떡칠을 해서 쉰내를 감추려고 부단히 노력한 티가 났다.
금산사와 더불어 최근 다녀왔었던
공주 마곡사 앞에서 먹었던 비빔밥과
너무도 비교돼서 실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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